지금 먹어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지금 먹어 어느 날, 빵집에 들어섰다. 눈이 오던 날도 아니고, 크게 춥지도 않은 날이었다. 다만 마음이 어쩐지 꺼칠했다. 별일이 없는데도 별일이 있는 것처럼 지치는 날이 있다. 사람은 그런 날,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비어 보여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지금 먹어 어느 날, 빵집에 들어섰다. 눈이 오던 날도 아니고, 크게 춥지도 않은 날이었다. 다만 마음이 어쩐지 꺼칠했다. 별일이 없는데도 별일이 있는 것처럼 지치는 날이 있다. 사람은 그런 날,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비어 보여서…
― 손잡이를 잡아 준 사람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마지막 계단 한 칸 ― 손잡이를 잡아 준 사람 청람 김왕식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생각보다 길다. 길다는 말은 단지 계단의 개수를 말하지 않는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고, 발끝에 힘이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오해가 남긴 상처 앞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오해가 남긴 상처다. 칼로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말 한마디에서 어긋난 마음은 오래 남는다. 더 아픈 것은, 그 오해가 대단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사랑, 가장 순수한 말 사랑은 참 따뜻한 말이다. 입술로만 꺼내도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듣기만 해도 삶이 잠시 부드러워진다. 세상에는 화려한 말이 많고, 똑똑한 말도 많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말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사랑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사람과의 관계, 오래 남는 법 상대가 왜 나를 멀리하느냐고 탓하기 전에 먼저 돌아봐야 한다. 사람은 원래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흐름을 억지로 붙들려할수록 관계는 더 빨리 숨이 막힌다. 관계는 소유가 아니라 호흡이다. 숨…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평온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 혼란은 바깥에서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안에서 완성된다. 사람은 사건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 때문에 무너진다. 같은 비바람을 맞아도 어떤 이는 우산을 접고 걷고, 어떤 …
■ 청테이프로 이어 붙인 빛 청람 김왕식 지하철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예배당의 긴 의자에 앉아 묵묵히 기도하는 신도들처럼. 그러나 손끝이 붙잡고 있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휴대폰이었다.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빛…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버려진 화분에서 피어난 온기 청람 김왕식 겨울은 늘 공평한 듯 보이나, 사실은 가장 약한 것부터 먼저 시험한다. 바람은 골목의 모서리를 꺾어 다니며 살갗을 베고, 사람들 마음마저 얼게 만든다. 그런 날이면 세상은 자꾸만 “버려도 된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안쪽의 방 내 안에는 작은 방이 있다 문이 없어서 늘 드나드는 방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듯 늘 누군가의 기척이 남아 방바닥은 조용히 따뜻하다 그대의 목소리는 그 방의 벽지를 바꾸었고 나는 뒤늦게 내 마음의 무늬를 본다 말은 밖에서 …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나무의 그림자 나무는 제 그림자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 그림자가 따라온다 따라오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걷는다 지우고 싶은 것도 끝내 남는 것들도 햇빛이 센 날일수록 그림자는 진해지고 진해질수록 나무는 더 또렷해진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마른 우물 울지 않는 날이 있다 그날의 눈은 마른 우물처럼 깊다 말라 있음은 없음이 아니다 안쪽으로 더 깊어지는 일이다 나는 웃으며 걸어가지만 발밑에서는 작은 물소리가 따라온다 사람들은 모른다 젖지 않은 얼굴이 가장 많이 젖어 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플라타너스 종로의 길 위 가로수의 상징처럼 버즘나무가 서 있다 봄에는 연둣빛 숨결로 도시의 얼굴을 씻어 내고 여름에는 혹서의 불길을 막아 그늘 한 장을 펼쳐 준다 가을이면 단풍으로 시간을 태우고 겨울이면 나목이 되어 세상의 말들을 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호박꽃 호박꽃은 아름답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 했는가. 사람들은 꽃을 볼 때 대개 위를 본다. 가지 끝에서 치솟는 화려함을 꽃의 자격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장마철 밭두렁에서 만나는 호박꽃은 위로 피지 않는다. 비를 맞고도 더 크게 벌어지지…
■ 청람이 쓰는 〈녹을 닦으며〉 신새벽 문을 연다 추위가 들어오고 부끄러움이 먼저 깨어난다 대문에 붙은 녹을 닦는다 철의 녹이 아니라 내 세월의 침전이다 말의 가시 눈치의 먼지 미루어 둔 사랑이 경첩마다 굳어 있다 문지르면 붉은 가루가 떨어진다 그것은 시간이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흔들림 끝에서 나를 되찾는 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아침, 눈을 뜨고 창문을 연다. 밤새 세상을 얼려 놓은 혹한이 실내로 스며든다. 몸이 먼저 움츠러들고 숨이 잠깐 멎는다. 그 찰나, 정신이 또렷해진다. 추위는 언제나 외부에서만…
■ 머물 수 없음을 알면서 오르는 이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끊임없이 정상에 오르려 한다. 정상은 늘 멀고, 도착하면 생각보다 작다. 바람이 세고, 발 디딜 자리는 좁다.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때서야 분명해진다. 잠시 숨을 고를 뿐, 곧 내려와야 한다…
■ 다시 밀러 가는 사람의 존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아침마다 같은 길을 걷는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 비슷한 표정들, 익숙한 피로가 몸에 먼저 와 닿는다.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한 번은 넘어져 본 기분이다. 우리는 늘 새로움을 기대하지만, 인생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비워지기 위해 오르는 곳 정상은 하늘이 잠시 몸을 내려놓는 접시 오르며 숨은 낡은 종이처럼 구겨지고 생각은 바람에 씻겨 점점 얇아진다 도착하면 산은 박수를 치지 않는다 빛 한 줄 건네며 이제는 내려갈 차례라고 말없이 적어 둔다 뒤…
■ 침묵으로 건너온 마음의 자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나는 나를 오래 바라보는 일을 피하며 살아왔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는 비교적 능숙했으나, 나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는 늘 주저가 따랐다.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해온 수많은 침묵과 합리화를 함…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보리 혹한을 건너는 빛의 윤리 보리의 압권은 혹한을 견딘 뒤에야 드러난다. 청보리가 바람을 만날 때, 그 잎들은 개별의 몸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 줄기 바람에도 밭 전체가 응답한다. 푸른 줄기들은 서로의 등을 밀지 않고, 앞서지도 않는다…
□ 오하산방 ■ 내려놓음이 머무는 자리, 오하 산방 청리움 깊숙이 말이 먼저 쉬는 곳 문턱을 넘자 시간이 신발을 벗는다 오하 산방 낮은 지붕 아래 생각도 허리를 굽힌다 바람은 목적 없이 창을 스친다 차 한 잔 김 위로 서두르던 마음이 풀린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사유의 기준을 다시 세우다 — 장준하 선생과 사상계의 현재성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장준하 선생은 한 시대의 논객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요구한 지성의 형식이었다. 그는 이념의 선동가가 아니었고, 권력의 대변자도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한국현대문학사 80년 (1945~2025) ― 존재의 언어로서의 서사와 서정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I. 서론 ― 해방 이후 80년, 문학으로 시대를 증언하다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며, 시대와 시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성된 존재의 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불씨를 옮기는 손 김왕식 부엌의 새벽은 언제나 어머니 혼자였다 불씨는 늘 작게 시작해 조심스레 숨을 붙여야 했다 젖은 장작은 쉽게 타오르지 않았고 불은 자꾸만 꺼지려 했다 어머니는 재를 헤치고 숨을 불어넣었다 불이 살아나면 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