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에 남은 물 한 모금
김왕식 ■ 어항 속에 남은 물 한 모금 텅 빈 수조, 고기들도 떠났고 남은 건 바닥에 고인 물 한 모금 그 물 위로 작은 날벌레가 앉았다 생은 늘 뜻밖의 무대에 올라 말없이 연기한다 물이 마르면 생도 끝날 줄 알았지만 끝이라 여긴 자리에서 시작은 다시 올라왔다…
김왕식 ■ 어항 속에 남은 물 한 모금 텅 빈 수조, 고기들도 떠났고 남은 건 바닥에 고인 물 한 모금 그 물 위로 작은 날벌레가 앉았다 생은 늘 뜻밖의 무대에 올라 말없이 연기한다 물이 마르면 생도 끝날 줄 알았지만 끝이라 여긴 자리에서 시작은 다시 올라왔다…
김왕식 ■ 기후 위기에 처한 우리의 미래 – 지금, 우리가 써야 할 이야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인류는 지금, 자기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는 쉴 틈 없이 달려왔다. 끝없는 소비와 성장의 서사는 번영을 약속했지만, 그 뒷면에…
김왕식 ■ 폐건물 지붕 위의 시 출입을 금한 문장이 녹슨 팻말로 벽을 막아도 시간은 끝난 적 없었다 금 간 유리,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 노란 숨결 하나가 고개를 든다 그것은 들꽃이 아니라 무너짐 속에 틔운 한 줄기 선언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고…
김왕식 ■ 무표정한 기사님의 등 검은 등짝 하나가 버스의 긴 숨을 밀고 있었다 말 없는 어깨는 수십 개의 피곤한 하루를 고요히 실은 짐칸 같았다 손잡이에 매달린 체온들, 창문에 기대선 무표정들, 그 모든 침묵을 등 하나가 끝까지 감싸 안고 갔다 종점에 닿아 문…
김왕식 ■ 엘리베이터 속의 계절 사각의 작은 상자 안, 낯선 바람들이 타인인 척 서로를 피해 섰다 눈은 저마다 주머니 속 햇살처럼 화면 안을 꼭 쥐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틈, 누군가 조용히 창을 열었다 “비 오네요” 그 말은 마치 묵은 먼지를 털어낸 …
김왕식 ■ 도서관 사서의 손등 책의 숨을 덮던 사서의 손등 위엔 바랜 흉터 하나, 지운 듯 남은 옛 문장의 쉼표였다. 반납 도장을 찍는 소리, 그것은 종이의 심장을 두드리는 오래된 인사처럼 가끔 책보다 먼저 다정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손을 지나 떠났지만 …
김왕식 ■ 길을 묻는 노인과 청년 신호등 앞 낯선 거리에 머문 발 노인의 눈빛이 늦가을 잎새처럼 흔들릴 때 주머니 속 따뜻한 봄 한 줌, 청년이 다가와 손끝으로 길을 짚었다 “같이 가요” 그 말 한 줄 등 굽은 시간에 불을 켜고 말없이 걷는 동안 노인은 몇 …
김왕식 □ 조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아침에 지인이 보내온 글이다. 생각해 볼 부분이 많아 몇 줄 적어봤다. ■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2022년에 94세로 작고하신 조 순 박사님이 89세 때 쓴 글이다. 고향이 강릉이며 서울…
김왕식 ■ 계단을 오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오늘도 아흔둘 할머니는 4층까지 계단을 오른다 매일 잠깐씩 쉬는 2층과 3층 사이 창문 틈 햇살이 참 곱다며 “이게 오늘의 보너스지” 하신다 사람은 오르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오르며 발견하는 아주 작은 기쁨으로 …
김왕식 ■ 낡은 운동화의 유서 가장 먼저 닳은 건 바닥도, 끈도 아니었다 비 오는 날 뛰던 골목 눈 오는 날 미끄러지던 골목 그때 남긴 웃음이었다 낡은 운동화는 말없이 서 있었다 다 달아진 몸뚱이로 ‘그래도 참 잘 살았다’고 ㅡ 청람
김왕식 ■ 심장이란 이름의 언어 심장은 하루에도 수만 번 뛰지만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용서하며 산다 그래서 심장은 언제나 가장 진실한 언어다 ㅡ 청람
김왕식 ■ 봄비의 속삭임 봄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귓가에 속삭인다. 밤새 추적추적, 그리움이 빗물에 섞여 내린다. 겉옷을 벗긴 나무 가지마다 봄이 스며들고, 잊고 있던 기억 한 조각이 물기를 머금는다. 비는 따뜻하다. 겨울 내 굳은 땅의 …
김왕식 □ 애기별꽃 ■ 애기별꽃의 첫사랑 김왕식 너무 작아서 눈에 잘 안 띄었지만 그 별 같은 하얀 꽃 처음 사랑할 때의 마음 같았다 설레고 조심스럽고 말 한 마디가 다 떨렸던 그 시절, 애기별꽃이었다 첫사랑은 항상 작고 희다 ㅡ 청람
김왕식 마름꽃 ■ 마름꽃의 심연 김왕식 물속 깊이 잎을 숨기고 마름꽃은 수면 위로 고개만 내밀었다 속이 깊은 사랑은 겉에 다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은 수심이다 ㅡ 청람
김왕식 ■ 다래순의 노래 김왕식 새벽마다 가늘게 고개 내밀고 하늘을 향해 노래하듯 자라던 다래순 너의 손끝이 이 봄의 선율이었다 노래는 음보다 향이 먼저다 ㅡ 청람
김왕식 ■ 둥굴레의 속내 김왕식 겉은 푸르고 단단하지만 속엔 달콤한 향 둥굴레는 겉보다 속이 먼저 자라는 풀 사람도 그런 풀 하나쯤은 닮아야 한다 진짜 향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ㅡ 청람
김왕식 ■ 빈 주머니의 품격 김왕식 옛날엔 다 가난했다. 도시락 반찬은 늘 김치 한 조각이었고, 운동화는 구멍 나기 전까지 신고 또 신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창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겨웠고, 당당했다. 돈은 없었지만 도리는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마음은 곧…
김왕식 ■ 어머니의 등짝, 그 따뜻한 교과서 김왕식 요즘 아이들은 회초리를 모른다. 맞으면 상처가 될까, 마음이 다칠까, 우리는 조심스럽다. 우리의 어머니는 달랐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고, 그 손끝에 밥 짓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등짝 스매싱엔 미움이…
김왕식 □ 며느리밥풀꽃 ■ 며느리밥풀꽃의 이름 김왕식 며느리, 밥풀, 꽃 이름 하나에 서러움 셋 그래도 너는 잎에 붉은 꽃을 달았다 바라보는 이에게 피식 웃음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서러움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견디는 것…
김왕식 ■ 알람 끄는 손끝 김왕식 아침 알람을 끄려다 다시 잠들었다. 늦잠이다. 그 몇 분 사이에 꾼 꿈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새벽, 그 시간만큼은 내 것이었다. 가끔은 늦은 시작이 외려 하루를 덜어준다. 시간을 앞서…
김왕식 ■ 숫눈을 밟는다 김왕식 첫눈이 왔다. 마당에 찍힌 첫 발자국.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 위를 걷는 기분은 묘하게 설렌다. 길을 걷는다기보다, 길을 만든다. 새하얀 바탕 위에 남기는 건 흔적이지만, 그건 또 다른 시작이다. 발자국은 …
김왕식 ■ 피곤한 축복 김왕식 저녁 무렵, 어깨 위로 내려앉은 피곤함이 마치 하루 종일 비를 맞은 허수아비 같았다. 바람에 흔들리며 쓸쓸히 서 있는 그것이 어쩐지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 허수아비는 밭을 지켰고, 나는 오늘 하루를 견뎠다. 무너질 듯한 눈…
김왕식 ■ 흰머리 한 올 김왕식 거울 앞에서 흰머리 하나를 발견했다. 뽑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 머리카락이 내 시간의 증거 같아서. 흰머리는 늙음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다. 자랑스러워야 할 흉터 같은 것. 남은 머리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