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숫자가 무너졌다 ―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각설하고 시인 이서빈 여우가 말했다 투표는 공정하다 닭들은 새벽을 믿고 각자의 울음을 횃대에 걸어 두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자신의 새끼를 슬쩍 밀어넣었다 밤이 깊어지자 부엉이는 눈을 감고, 두더지는 땅속에서 숫자를 뒤적였다 아침이 되었다 닭들은…
■ 각설하고 시인 이서빈 여우가 말했다 투표는 공정하다 닭들은 새벽을 믿고 각자의 울음을 횃대에 걸어 두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자신의 새끼를 슬쩍 밀어넣었다 밤이 깊어지자 부엉이는 눈을 감고, 두더지는 땅속에서 숫자를 뒤적였다 아침이 되었다 닭들은…
□ 신계전 시인 ■ 호강 시인 신계전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만 생각하다 주린 배 낡은 옷에 벼락치기 비싼 수의壽衣 살아서 엄두도 못 낸 리무진을 타고 가네 ■ 가장 짧은 생애, 가장 긴 울림 ― 신계전 시인의 「호강」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 한범수 교수의 '파랑창고' 정원 □ 처마에 맺힌 이슬방울 ㅡ 사진 한범수 교수 ■ 비 시인 한범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창으로 스며드는 찬바람 루핑 덮은 판잣집 크고 작은 그릇 또르락 떨어지던 빗방울 걸레 짜는 손 꾸벅 졸던 백열전구 화…
■ 분만실 시인 변희자 시골집 마당 초록빛 왕잠자리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두리번거린다 맴돌다 멈칫하다 배 끝을 구부렸다 폈다 한낮의 뜨거운 숨을 날개에 품은 채 푸른 숲, 연못을 놔두고 마루 끝 가짜 꽃에 새 생명을 맡기려 한다 ■ 꽃은 피어 …
■ 조팝나무의 입대식 시인 이영하 새벽 산책길. 조팝나무들이 하룻밤 사이 모두 같은 머리가 되어 서 있었다. 가지 끝까지 다듬은 모습이 막 입대한 훈련병들처럼 말없이 줄을 맞추고 있었다. 문득 오래전 교육사령부 연병장이 떠올랐다. 학생이던 청년들이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멸종은 한 종씩 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새 한 마리였다 숲은 잠시 조용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해에는 벌이 늦게 왔다 꽃은 하루 종일 향기를 피워 놓고도 아무에게도 봄을 건네지 못했다 강은 물고기 한 종의 이름을 잊었고 바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꿀벌이 떠난 식탁 식탁은 늘 꽃에서 시작되었다 사과 한 알도, 딸기 한 알도, 참깨 한 톨도, 누군가의 작은 날개를 지나온 열매였다 우리는 빵을 먹으며 밀을 기억했고 과일을 먹으며 햇살을 기억했다 그 사이를 수없이 오가던 작은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사라진 새의 출석부 봄이 되면 숲은 출석을 불렀다 종달새 딱새 꾀꼬리 후투티 이름 하나가 불릴 때마다 하늘은 깃털 한 장씩 푸르게 열렸다 나무들은 가지를 들어 대답을 기다렸고 바람은 빈칸을 남기지 않으려 숲 사이를 뛰어다녔다 어…
■ 세상 시인 우병기 물은 물 따라 흐르고 바람은 바람 따라 구름은 구름 따라 흘러가는데 느리거나 빠르거나 늘 더불어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달라 난사람 든사람은 끼리끼리 가고 된사람은 사방천지 찾기조차 어려워 마냥 서글퍼라 석양빛 등에 걸친 나그네여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마지막 개구리의 발음 논은 저녁이 되면 개구리의 목소리로 하루를 닫았다 별은 그 울음을 따라 논두렁에 내려앉았고 달은 물결마다 은빛 모음을 심었다 아이들은 개구리 소리를 여름의 발음이라 배웠다 어느 해 논은 입을 다물었다 농부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물고기의 투명한 무덤 아무도 바다에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파도는 비석을 세우지 않고 조류는 조문弔文을 배우지 않았다 죽음은 늘 물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어느 날 물고기 한 마리가 배를 뒤집은 채 떠올랐다 눈은 아직도 푸른 바다를 …
■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시인 청민 박철언 진초록 땅 위에 태양이 타오르고 이육사의 청포도가 생각나는 7월은 나에겐 민족분단의 아픔을 절감하게 합니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뒷받침하여 다음해 7월2…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박제剝製된 날개의 방향 새는 죽어서도 하늘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박제剝製라 불렀다 깃털을 고르고 눈동자를 닦고 날개를 펼쳐 유리 진열장 안에 영원을 세웠다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참 예쁘다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아. 새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고래의 뱃속에서 발견된 도시 청람 김왕식 고래가 해변으로 떠밀려 왔다 사람들은 죽음을 먼저 보았고 학자들은 몸길이를 재었으며 기자들은 속보를 보도했다 한 아이만 고래의 귀에 아직 바다가 들리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배를 열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겨울의 실종신고 청람 김왕식 겨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늦는 줄 알았다 달력은 여전히 십이월을 넘겼고 가로수는 잎을 내려놓았지만 바람은 두꺼운 외투를 입지 않았다 기상청은 평년보다 높다고 발표했고 도시는 얇은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섬 하나가 물속으로 이사 갔다 청람 김왕식 아무도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았다 포장 상자도 주소 변경 신고도 환송 인사도 없었다 새벽 밀물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렸다 섬은 아무 말 없이 마당을 접었다 우물 하나를 가슴에 품고 백 …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행성의 붉은 교정지 청람 김왕식 지구는 원고를 한 번도 완성본이라 부른 적이 없다 계절마다 한 장씩 고쳐 쓰고 있었을 뿐이다 봄은 연둣빛 연필로 숲의 첫 문장을 적었고 여름은 강물의 여백을 조금 넓혀 주었다 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지구본에서 바다가 흘러내렸다 청람 김왕식 교실 한쪽에 오래된 지구본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아이 하나가 손가락 끝으로 푸른 부분을 쓰다듬자 바다가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페인트가 벗겨지는 줄 알았다 며칠 뒤 태평양이 책…
■ 나무는 도덕경을 읽는다 시인 素江 정근옥 포기할 수 없는 삶이 다가오더라도 나무는 한겨울에도 눈을 틔우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길이 다가와도 나무는 욕망의 비탈길을 향해 곧은 길을 버리고 돌아가지 않는다 한순간 비바람 몰아치는 밤이 와도 나무는 밤새…
■ 이런 나였으면 시인 청민 박철언 가슴에 빈자리 하나 품고 살다가 그대가 유난히 쓸쓸해 보일 때면 마음의 빗장 풀고 그 자리 내어주는 허물을 탓하지 않고 말없이 어두워지는 아픔을 껴안아 줘 흔들림 없는 소나무가 되어주는 무더운 여름철 마음속 뜨락까지 파고…
■ 여름 엽서 28 시인 주광일 노년에 어두어진 귀 때문이었던가. 늘 아무 말도 없이 친구들을 즐겁게하던 그대의 부음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서로 아무 말이 없어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던 서울대공원 둘레길. 친구여, 장마철 한 가운데 모…
□ 이서빈 시인의 시집 《올챙이를 산란하는 비요일》 □ 이서빈 작가 ■ 오리시계 시인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 이서빈 작가 ■ 올챙이를 산란하는 비요일 시인 이서빈 비요일 유리창에서 운쟁이가 끊임없이 태어난다 한 마리 두 마리 끝없이 줄지어 눈썹 휘날리며 곤두박질치며 헤엄치는 올챙이 다리는 뱃속에서 속도를 굴린다 볼록한 비밀에 싸여있던 앞다리 뒷다리…
■ 먼저 피어 준 사람 김 현 그대는 봄보다 먼저 내 마음에 피어난 한 송이 이름이었다. 바람은 그대의 안부를 닮아 닿을 듯 말 듯 창가를 서성였고, 저녁노을은 하루를 다 태우고도 남은 그리움을 붉은 꽃잎으로 접어 하늘 끝에 걸어 두었다. 사랑은…